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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자들의 시대
ACT 0  ·  Prologue
감시자들

아우렐 제국은 지구를 발견한 순간 침공을 결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제국은 서두르는 문명이 아니었다. 수백 개의 항성계와 수천 개의 거주 행성, 수조의 시민과 수많은 종족을 하나의 질서 아래 묶어 둔 문명에게 시간은 강물에 가까웠다. 흐르고, 깎고, 쌓이며, 결국 모든 것을 자기 방향으로 돌려놓는 것. 제국에게 침공은 분노의 결과가 아니라 계산의 끝이었다.

아우렐 제국력 7421년.

제7원정함대 기함 벨라토르의 함교는 푸른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수백 미터에 달하는 공간은 전통적인 함교라기보다 성당에 가까웠다. 천장은 너무 높아 끝이 보이지 않았고, 벽면에는 별자리처럼 빛나는 전술 정보가 층층이 떠 있었다. 수백 명의 장교가 움직였지만 소음은 거의 없었다. 제국의 군대는 소리 지르지 않았다. 명령은 음성보다 빠른 신경망으로 전달되었고, 판단은 감정보다 차가운 수치로 검증되었다.

그 중앙에 지구가 떠 있었다.

푸른 행성. 검은 우주 한가운데 물방울처럼 떠 있는 세계. 태양빛을 받은 대양은 깊고 아름다웠으며, 구름은 대륙 위를 느리게 흘렀다. 초록빛 생명권은 행성 전체에 촘촘히 뿌리내리고 있었다. 벨라토르의 장교들 중 몇몇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늦추었다. 수십 개 성간 전쟁을 겪은 이들조차 그 행성 앞에서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보고서의 결론이 되지 못했다.

카시안 발테리온은 함교 중앙에 서 있었다. 은빛 제복 위로 황실 원정군의 검은 망토가 어깨를 타고 흘렀다. 그는 아우렐 제국 제7원정함대 총감이었고, 지구 원정군의 최고 책임자였다. 제국 본토에서라면 그는 거대한 체스판의 말 중 하나였지만, 이 외곽 항성계에서는 사실상 황제의 손이었다.

그의 앞에 보고서가 펼쳐졌다.

『관찰 프로젝트 E-17』 『대상: 지구 생명권 및 현지 지성 종족』 『관찰 기간: 현지 기준 84년』

카시안은 손끝을 움직였다. 수백 개의 창이 동시에 열리고 닫혔다. 생태 분포. 대기 구성. 해양 심층 미생물. 포유류 신경계. 식물의 세포 복구율. 인간의 유전체 변이. 도시 확장 속도. 산업화 곡선. 전쟁 빈도. 우주 개발 능력. 인공지능 연구 수준.

그리고 마지막 항목.

『특이점 적응성』

그 단어가 떠오르는 순간 함교의 공기가 달라졌다.

특이점.

제국의 심장. 제국의 축복. 제국의 저주.

아우렐 제국은 오래전 초소형 인공 특이점을 안정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무한에 가까운 에너지였고, 성간 항행과 반중력, 프라임 프레임과 항성 요새, 수많은 행성을 잇는 제국 질서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완벽한 기술은 존재하지 않았다. 수천 년 동안 특이점 기술은 제국 문명 전체에 보이지 않는 부작용을 남겼다. 유전자, 신경계, 정신 구조, 생태계. 모든 것이 아주 느리게, 그러나 분명하게 변질되고 있었다.

제국은 그 사실을 숨겼다. 그러나 황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구가 발견되었을 때, 황실은 함대를 보내지 않았다. 대신 관측기를 보냈다. 침공군이 아니라 학자를 보냈다. 정복자가 아니라 감시자를 보냈다.

84년 동안.

그리고 이제 결론이 나왔다.

부관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최종 평가를 보고드리겠습니다."

카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라."

"지구 생명권은 이상 개체입니다."

함교가 조용해졌다.

제국에서 이상 개체라는 표현은 쉽게 쓰이지 않았다. 설명되지 않는 것. 통계 밖의 것. 기존 이론으로 포섭할 수 없는 것. 그것은 학술 용어이자 경고문이었다.

"수치."

"제국 표준 생명권 평균 대비 특이점 간섭 저항성 417퍼센트."

카시안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인류만인가."

"아닙니다."

허공에 새로운 목록이 펼쳐졌다. 인간. 고래. 까마귀. 균류. 조류. 해양 미생물. 벼. 이끼. 심해 열수구 박테리아.

"행성 생태계 전체가 같은 경향을 보입니다."

"원인."

"불명."

"가설."

"2,184개."

"검증."

"성공 사례 없음."

카시안은 지구를 바라보았다. 너무 평범해 보이는 행성. 너무 작고, 너무 어린 문명. 그러나 제국 최고 연구기관조차 설명하지 못하는 생명권.

부관은 다음 보고서를 띄웠다.

『현지 지성 종족 문명 발전 예측 모델』

수많은 그래프가 떠올랐다. 어떤 그래프는 완만했고, 어떤 그래프는 계단처럼 꺾였으며, 몇몇은 거의 수직에 가깝게 상승하고 있었다. 제트기. 핵무기. 위성망. 인터넷. 인공지능. 우주 탐사. 불과 한 세기 남짓한 시간 동안 이루어진 변화였다.

"오차 범위."

"3.1퍼센트."

"재검증."

"87회."

"결과."

"동일합니다."

연구 장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현지 문명이 외부 개입 없이 발전할 경우, 149년 이내 독자적 특이점 문명 형성 가능성이 확인되었습니다."

149년.

제국의 시간 감각으로는 찰나에 가까웠다.

"위협 평가는."

"현재는 미미합니다."

"미래는."

"매우 위험합니다."

"제국 질서 편입 가능성."

"낮습니다."

"이유."

"현지 종족은 권위에 대한 순응성이 낮고, 위기 상황에서 적응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상승합니다. 또한 생존 압력이 가중될수록 기술 발전 속도가 빨라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카시안은 희미하게 웃었다.

"궁지에 몰릴수록 진화하는 종족이라."

그 말에 담긴 것은 조롱이 아니었다. 감탄도 아니었다. 그것은 경계였다.

부관이 마지막 문서를 열었다. 황실 직속 명령서. 황금색 인장이 어둠 속에서 차갑게 빛났다.

『행성 확보 승인』 『생명권 보존』 『현지 지성 종족 멸절안 기각』 『문명 발전 억제』 『장기 관찰 및 통제』 『제국 보호령 편입』

카시안은 명령서를 오래 바라보았다.

"멸절안은 완전히 폐기되었나."

"예. 연구 가치가 지나치게 높습니다."

"합리적이군."

부관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다만, 본국은 추가 전력을 배정하지 못했습니다."

카시안의 시선이 천천히 부관에게 향했다.

"외곽 전선인가."

"예. 제국 주력함대의 대부분은 여전히 은하 외곽 전선에 묶여 있습니다. 황실은 지구를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했으나, 총력전을 수행할 여력은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카시안은 다시 지구를 보았다. 작은 행성. 그러나 제국이 주력을 보낼 수 없는 시대에 발견된 위험한 가능성.

"그래서 우리뿐인가."

"제7원정함대와 산하 주둔군이 지구 확보 및 관리 임무를 수행합니다."

"충분하다."

카시안은 조용히 말했다. 그 말에는 오만이 없었다. 그저 수치에 근거한 판단이 있었다. 현재의 인류에게 제7원정함대는 은하제국 전체와 다를 바 없었다.

그는 손을 내렸다. 그것이 명령이었다.

벨라토르 주변의 공간이 천천히 뒤틀렸다. 별빛이 길게 늘어지고, 검은 우주가 물결처럼 흔들렸다. 수천 척의 함선이 동시에 항법장에 진입했다. 현실이 접혔다. 거리라는 개념이 찢어졌다.

제7원정함대. 태양계 접근 개시.

· · ·

그리고 같은 시각.

지구.
대한민국 강원도 평창.
한국천문연구원 관측실.

박정우는 식은 커피를 들고 모니터를 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지?"

태양계 외곽.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야 할 공간. 그곳의 중력 수치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오류가 아니었다.

무언가가 오고 있었다.

그리고 박정우는 아직 알지 못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긴 72시간이 지금 막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ACT 1
72시간

2026년 11월 21일.

처음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외계 함대라는 말은 너무 낡은 농담 같았다. 영화와 음모론, 허름한 인터넷 게시판과 삼류 다큐멘터리에나 어울리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날 오후부터 전 세계 천문대가 같은 좌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미국. 유럽. 중국. 일본. 인도. 한국. 민간 관측소까지.

명왕성 궤도 너머.

수백 개의 물체가 일정한 간격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자연 천체가 아니었다. 혜성도 아니었다. 소행성군도 아니었다.

그것들은 진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속도는 광속의 12퍼센트에 도달해 있었다.

한국천문연구원 관측실은 몇 시간 만에 전쟁지휘소처럼 변했다. 전화벨은 계속 울렸고, 누군가는 영어로 소리쳤고, 누군가는 계산식을 세 번째로 검산했다. 박정우는 모니터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박 박사님."

후배 연구원 김민석이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미국도 확인했습니다. ESA도요. 중국도 같은 데이터랍니다."

박정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모니터 속 수치를 바라보았다. 거리. 속도. 가속 패턴. 중력 왜곡. 모든 것이 한 가지 결론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드디어 왔구나."

김민석이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요?"

박정우는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우리가 먼저 찾을 줄 알았는데."

그날 밤, 세계의 지도자들은 같은 단어를 입에 올렸다.

외계인.

누군가는 군사 위성을 재배치했고, 누군가는 핵전력 경계 태세를 올렸으며, 누군가는 대국민 연설문을 썼다가 찢었다.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 지하 상황실에서 아무 말 없이 화면을 바라보았다. 중국 중앙군사위원회는 위성망의 절반을 태양계 외곽으로 돌렸다. 러시아는 북극해의 핵잠수함에 비상 명령을 보냈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국가위기관리센터에서 보고서를 읽고 한동안 눈을 감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 · ·

사흘 뒤.

2026년 11월 24일.
서울역.

퇴근길 인파로 가득한 역사 안에서 사람들은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뉴스 앱은 마비되었고, SNS는 소문과 공포, 조롱과 기도로 넘쳐났다. 누군가는 외계 함대를 가짜라고 했고, 누군가는 종말이라고 했다. 어떤 학생은 친구에게 웃으며 말했다.

"야, 진짜면 우리 출석 인정되냐?"

친구가 대답하려는 순간, 역사 안의 모든 전광판이 꺼졌다.

광고가 사라졌다. 뉴스가 멈췄다. 휴대전화 화면이 동시에 검게 변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뭐야?"

"정전?"

"통신 장애 아냐?"

그때 검은 화면 위에 흰 문장이 떠올랐다.

『본 행성은 아우렐 제국 관리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서울역이 조용해졌다. 누군가 웃었다. 긴장한 웃음이었다.

두 번째 문장이 나타났다.

『귀 행성의 지성 종족은 제국 보호령으로 편입된다.』

세 번째.

『72시간 후 관리 절차를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

『저항은 비효율적이다.』

그 말이 떠오른 순간 누군가가 소리쳤다.

"뭐라는 거야, 저 새끼들이!"

분노였다. 두려움이었다. 부정이었다.

그날 밤, 인류는 잠들지 못했다.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늘 달과 별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하늘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ACT 2
관리 절차
2026년 11월 27일.
오전 10시 17분.

72시간이 끝났다.

태평양 서부 해역.
USS 로널드 레이건 항공모함 전단.

바다는 비정상적으로 고요했다. 비행갑판 위에서는 F/A-18 전투기들이 마지막 점검을 받고 있었다. 정비병들은 익숙한 절차를 반복했지만 손끝이 조금씩 떨렸다. 조종사들은 농담하지 않았다.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것은 훈련이 아니었다.

전투정보실의 대형 스크린에는 태평양 상공이 표시되어 있었다. 붉은 점들이 궤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몇 개였다. 곧 수십 개가 되었다. 그리고 수백 개로 늘어났다.

"궤도 목표 다수 이동 개시!"

함장이 천천히 일어났다.

"예상 진입 시간."

"13분."

"교전 규칙은."

"72시간 종료와 동시에 방어 교전 승인입니다."

그 순간 전술 담당 장교가 외쳤다.

"고고도 물체 확인!"

스크린이 확대되었다. 푸른 하늘 위. 점 하나가 보였다.

처음에는 먼지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빠르게 커졌다. 구름층을 뚫고 내려오면서 그 형체가 드러났다.

인간형. 은빛 장갑. 고층 건물에 맞먹는 크기. 등 뒤로 흐르는 푸른 빛.

그것은 낙하하고 있었지만 추락하지 않았다. 중력을 무시하듯, 하늘이라는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는 것처럼 움직였다.

전투정보실 안에 있던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저게 병기라고?"

같은 시각, 전 세계 수십억 명이 그 장면을 생중계로 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욕설을 퍼부었다. 기도했다. 울었다. 그리고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우리는 싸울 수 있다.

수십 년 동안 쌓아 올린 인류의 군사력이 움직였다. 항공모함 전단이 전투 태세에 들어갔다. 수직발사관이 열렸다. 함대공 미사일이 하늘로 솟구쳤다. 전투기가 이륙했다. 이지스함의 레이더가 타오를 듯 회전했다.

"발사!"

수십 발. 수백 발.

미사일들이 은빛 거인을 향해 날아갔다.

충돌. 폭발. 섬광.

하늘이 불타올랐다. 전투정보실에서 짧은 환호가 터졌다. 그리고 연기가 걷혔다.

은빛 거인은 그대로 서 있었다.

장갑에는 그을음조차 없었다.

"피해 반응은?"

레이더 담당관은 입술을 떨었다.

"없습니다."

"없다니?"

"아무것도 없습니다."

은빛 거인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마치 인사하듯. 혹은 실험용 동물을 관찰하듯. 푸른 빛이 손바닥 위에 모였다.

전투정보실의 모든 센서가 비명을 질렀다. 계측기가 한계를 넘고, 경고음이 중첩되어 하나의 긴 비명처럼 울렸다.

빛이 터졌다.

함장은 처음에 자신이 본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늘이 휘어졌다. 빛이 직선으로 날아가지 않았다. 공간 자체가 접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함대 중앙에 있던 구축함 한 척이 사라졌다.

폭발도 없었다. 잔해도 없었다. 그냥 없었다.

누군가가 낮게 말했다.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그날 인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것은 국가 간 전쟁이 아니었다. 기술 격차도 아니었다.

그것은 문명 그 자체의 격차였다.

ACT 3
30일 전쟁

전쟁은 하루 만에 끝나지 않았다. 그 점이 오히려 더 잔인했다.

인류는 싸웠다. 항공모함 전단이 침몰했고, 공군기지가 불탔으며, 위성망은 차단되었다. 그래도 인류는 싸웠다. 미국은 대륙간 타격 전력을 동원했고, 중국은 해안 방어망을 총가동했다. 러시아는 북극해에서 잠수함을 움직였고, 유럽은 남은 항공전력을 긁어모았다. 일본, 한국, 인도, 호주, 중동, 남미. 인류가 가진 거의 모든 군사력이 하늘을 향해 발사되었다.

결과는 같았다.

전차는 불탔다. 전투기는 격추되었다. 기지는 침묵했다. 위성은 하나씩 꺼졌다.

핵무기는 인류가 기대한 최종 카드가 되지 못했다. 발사 준비 중인 탄도미사일 사일로는 궤도에서 정밀 타격을 받았다. 잠수함은 제국의 특이점 기반 심해 탐지망에 위치가 노출되었고, 일부 핵탄두는 목표에 도달하기 전에 기능을 상실했다. 몇 발은 터졌다. 그러나 그조차 제국의 전진을 멈추지 못했다.

제국은 도시를 무차별로 불태우지 않았다. 그들은 항복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부청사를 점령하고, 군사시설을 무력화하고, 우주 개발 능력을 제거했다. 연구소를 봉쇄했다. 통신망을 장악했다. 군 지휘체계를 끊었다. 사람을 모두 죽이는 대신, 인간이 스스로 조직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하나씩 제거했다.

30일째 되는 날.

뉴욕의 하늘에 은빛 깃발이 걸렸다. 베이징의 중앙군사위원회 건물 위에도. 모스크바의 방공망은 침묵했고, 런던의 지하 벙커는 연락을 끊었다. 서울은 폐허가 되지 않았다. 도쿄도 완전히 불타지 않았다. 파리의 병원은 계속 운영되었고, 카이로의 시장은 며칠 뒤 다시 열렸다.

그것이 더 무서웠다.

제국은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인류의 미래를 압수했다.

ACT 4
패배의 질서
2032년.
침공으로부터 6년이 지났다.

인류의 약 60퍼센트가 살아남았다. 그러나 살아남았다는 말은 자유롭다는 뜻이 아니었다.

서울역 광장에는 더 이상 태극기만 걸려 있지 않았다. 가장 높은 깃대에는 은빛 깃발이 펄럭였다. 푸른 원형 문양과 세 개의 빛줄기. 아우렐 제국의 표식이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퇴근길 사람들은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편의점에서는 삼각김밥이 팔렸고, 버스 정류장에서는 학생들이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 병원은 운영되었고, 학교도 문을 열었다. 지하철도 움직였다.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다만 모든 것이 허가 아래 존재했다.

거리에는 센티널 정찰 드론이 떠다녔다. 매끄러운 백색 장갑과 푸른 센서광을 가진 제국 정찰 드론은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스캔했다. 주요 교차로에는 센티널 헌터가 배치되어 있었다. 야간 통행은 제한되었다. 장거리 이동에는 허가가 필요했다. 독립적인 과학 연구는 금지되었다. 군사 기술 개발은 사형에 준하는 범죄가 되었다. 우주 개발은 인류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광고판에는 매일 같은 문장이 흘러나왔다.

『평화는 질서로부터 시작됩니다.』 『아우렐 제국은 인류의 번영을 보장합니다.』 『등록되지 않은 기술 연구는 불법입니다.』 『A-Class 운용구역 접근 금지. 무단 접근 시 즉결 처분.』

처음 그 문장이 도시 곳곳에 걸렸을 때 사람들은 물었다.

"A-Class가 뭐야?"

누군가는 은빛 거인이라고 답했다. 누군가는 외계 기동병기라고 했다. 방송국은 며칠 동안 제국 경고문을 그대로 읽었다. 군은 그것을 기록했다. 정부는 해석하지 못한 채 공표했다.

그날 이후 인류는 은빛 거인들을 그렇게 불렀다.

A-Class.

정식 명칭은 아니었다. 인류가 이해할 수 있는 최초의 표식일 뿐이었다.

편의점 앞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가 캔맥주를 들었다.

"저거 볼 때마다 열 받지 않냐?"

옆의 친구가 주변을 살폈다.

"작게 말해."

"6년째야. 서울 한복판에 외계인 깃발이 걸려 있는데, 그게 정상 같냐?"

"정상 아니지."

친구는 한참 뒤에야 말했다.

"그래도 폭격은 안 하잖아."

남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이 가장 끔찍했다.

제국은 사람들을 굶기지 않았다. 도시를 불태우지 않았다. 학교와 병원과 시장을 남겨 두었다.

그리고 미래만 가져갔다.

서울역 버스환승센터에는 젖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겨울비가 천장을 두드렸고, 버스 도착 안내판에는 지연 표시가 떠 있었다. 한쪽 벤치에 앉은 대학생 둘은 같은 과 점퍼를 입고 있었다. 한 명은 이어폰 한쪽을 빼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젖은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 두고 있었다.

"야."

"응?"

"너 아직도 항공우주공학과 다니냐?"

잠깐 침묵이 내려앉았다.

"다니긴 하지."

"왜?"

"뭐가."

"그걸 왜 다녀."

그 말은 잔인했지만 틀리지 않았다. 항공우주공학과는 아직 존재했다. 교수도 있었고, 강의도 있었고, 시험도 있었다. 졸업장도 나왔다. 다만 졸업장 너머에 도착할 곳이 없었다.

"연구하면 잡혀가잖아."

친구가 낮게 말했다.

"고출력 추진기관 연구 금지. 우주항행 기술 연구 금지. 특이점 관련 연구 금지. 고등 AI 연구 제한."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걸리면 제국 조사국."

"알아."

"돌아온 사람 거의 없다며."

"알아."

"그런데 왜 계속 다니냐고."

버스가 도착했지만 둘은 일어나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올라탔다. 젖은 우산들이 차례로 접혔다. 버스 안의 형광등이 빗물에 번져 흐렸다.

항공우주공학과 학생은 한참 동안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구름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곳. 초등학생 때는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었다. 중학생 때는 로켓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다. 고등학생 때는 화성 궤도 정거장을 설계하고 싶었다. 대학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정말 가능할 줄 알았다. 인류는 언젠가 화성에 도시를 세우고, 유로파의 얼음을 뚫고, 타이탄의 호수 위에 착륙할 거라고 믿었다.

그 믿음은 법령 하나로 금지되었다.

"그래도."

그가 말했다.

"좋아했거든."

"뭘?"

"별."

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센티널 정찰 드론 하나가 정류장 위를 지나갔다. 푸른 센서광이 잠깐 두 사람의 얼굴을 훑고 사라졌다. 그들이 입을 다문 것은 드론 때문인지, 아니면 더 할 말이 없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도시는 살아 있었다. 가게도 있었다. 학교도 있었다. 회사도 있었다. 사람들은 웃었고, 사랑했고, 버스를 놓쳤고, 내일의 식비를 걱정했다.

그러나 미래는 없었다.

그날 밤, 서울 외곽의 폐쇄된 지하철 터널에서 철문이 열렸다. 녹슨 소리가 어둠 속으로 길게 번졌다. 안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한국군 잔존 병력. 민간인. 대학생. 공장 노동자. 전직 경찰. 그리고 너무 어려 보이는 소년까지.

낡은 전술복을 입은 남자가 지도를 펼쳤다.

"이번 목표는 부산 남동쪽 해안의 제국 보급거점이다."

누군가 숨을 들이켰다.

"이번에도 NOAH 정보입니까?"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름이 나오자 사람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NOAH.

소문 속의 도시. 심해를 움직이는 검은 요새. 인류의 마지막 자유.

누군가 낮게 말했다.

"진짜 있긴 한 겁니까?"

다른 사람이 웃었다.

"있어야지."

웃음은 짧았다. 그러나 그 짧은 웃음이 터널 안의 공기를 바꾸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ACT 5
NOAH 프로젝트

NOAH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름이 공식 문서에 적히기 전, 그것은 폐쇄된 지하주차장 한가운데 펼쳐진 젖은 지도 위에 있었다.

2027년 1월 17일.
대한민국 서울.
제국 통치구역 17.

비가 내리고 있었다.

천장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콘크리트 바닥을 때렸다. 형광등은 낡았고, 환풍기는 오래된 병자의 숨처럼 끊어질 듯 돌아갔다. 주차장 출입구는 트럭 두 대와 낡은 방화 셔터로 막혀 있었다. 그 안쪽, 임시로 세운 플라스틱 테이블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완전히 믿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에밀리 카터는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낡은 프로젝터를 켰다. 벽면에 지구가 떠올랐다. 붉은 점이 대륙과 바다를 덮었다. 제국 감시망. 제국 주둔지. 제국 통신중계탑. 제국 조사국 지부. 그리고, 아직 살아남은 인간 저항 거점들.

푸른 점은 몇 개 없었다.

"동남아 거점은?"

아드리안 케인이 물었다. 전 영국 해군 제독. 그는 더 이상 군복을 입지 않았지만, 앉는 자세 하나만으로도 군인이라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소피아 로드리게스가 대답했다.

"어젯밤 끊겼습니다. 마지막 송신은 03시 12분. 이후 침묵."

"남미?"

"두 곳 남았습니다. 오래 못 버팁니다."

"유럽은."

소피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답이었다.

아드리안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욕설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삼켰다. 욕은 이미 충분히 했다. 욕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지상에서는 끝났군."

에리히 바이스가 말했다. 전직 독일 정보기관 분석관이었던 그는, 회의가 시작된 뒤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차갑게 들렸다.

"산도 안 됩니다. 지하도 오래 못 갑니다. 궤도 감시는 이미 촘촘하고, 대도시 통신망은 전부 제국 손에 있습니다. 지상에 오래 머무는 저항조직은 반드시 발견됩니다. 인간은 결국 먹고, 자고, 숨 쉬어야 하니까요."

"그럼 어디로 가자는 거죠?"

누군가 물었다.

에밀리는 대답 대신 지구 홀로그램을 회전시켰다. 푸른색이 벽 전체를 채웠다.

바다.

"설마."

아드리안이 웃었다.

"심해?"

"예."

에밀리가 말했다.

"제국은 하늘을 장악했습니다. 궤도도, 대기권도, 지상 통신망도. 하지만 지구의 모든 심해를 실시간으로 감시하지는 못합니다. 특히 이동하는 목표라면."

"도시를 만들자는 겁니까?"

"도시이자 조선소. 연구소. 병원. 학교. 군사기지."

"미쳤군."

"알고 있습니다."

"수천 미터 아래에서?"

"예."

"제국 감시망을 피해?"

"예."

"그 도시로 뭘 할 겁니까. 숨기만 할 건가요?"

에밀리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아뇨."

그녀가 다음 도면을 띄웠다. 인간형 병기의 실루엣이었다. 높이 4미터 남짓. 투박한 장갑. 불완전한 관절. 제국의 은빛 거인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도면을 본 순간, 회의실 안의 몇몇은 숨을 멈췄다.

그것은 인간이 다시 싸우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름은?"

소피아가 물었다.

에밀리는 도면을 바라보았다.

"발키리."

"죽은 자를 전장으로 데려간다는 그 발키리?"

"아니요."

에밀리가 고개를 저었다.

"죽은 자들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을 다시 전장에 세우기 위한 이름입니다."

아드리안이 낮게 웃었다.

"당신은 제정신이 아니군, 교수."

"제정신인 사람들은 이미 항복했죠."

처음으로 회의실에 웃음이 번졌다. 금방 사라졌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절망 속에서 웃음이 나온다는 건 아직 무언가 살아 있다는 뜻이었다.

에리히는 한참 동안 도면을 보다가 물었다.

"동력은?"

"소형 핵융합로. 안정성은 떨어집니다."

"파일럿은 버팁니까?"

에밀리는 대답하기 전에 눈을 감았다.

"그냥은 어렵습니다."

"약물?"

"ARES Mk-I. 반응속도와 신경 부하를 보조하기 위한 임시 해법입니다. 장기 부작용은 큽니다."

"죽는다는 뜻이군."

"싸우지 않아도 죽습니다."

이번에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회의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매튜 워커는 남은 군사 네트워크를 내놓았다. 아드리안은 붕괴한 국가들의 잔존 정치 채널을 연결하겠다고 했다. 소피아는 정보망과 작전망을 맡았다. 빅토르 페트로프는 버려진 잠수함과 해저 플랜트, 심해 채굴 시설, 조선소 잔해를 긁어모으겠다고 말했다. 에리히 바이스는 정보 보안과 배신 가능성까지 계산하겠다고 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하기로 했다.

프로젝터 마지막 장에 이름이 떠올랐다.

NOAH.

노아. 멸망하는 세상에서 생명을 싣고 떠난 방주. 하지만 그들은 피난처를 만들 생각이 아니었다.

노아는 숨기 위한 도시가 아니라 다시 싸우기 위한 도시가 될 것이었다.

몇 년 뒤, 태평양 심해에는 무광 흑색과 짙은 남색 장갑으로 봉인된 도시가 움직이게 된다. 길이 3.2킬로미터, 폭 720미터, 높이 420미터. 군사기지와 연구소, 생산시설과 병원, 학교와 시장, 주거구역과 추모공원을 품은 심해 이동 도시.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부상자가 중앙병원으로 실려 오고, 시장구역에서는 군인과 민간인이 같은 줄에 서서 커피를 받는 도시.

그곳은 인류의 마지막 생존지가 아니었다.

마지막 자유 도시였다.

그리고 자유는 매일 피를 요구했다.

2030년부터 2032년까지, NOAH는 전 세계 레지스탕스와 연결되었다. 센티널 잔해를 역설계해 인류만의 무인 전력을 만들었다. 고스트는 목표를 향해 돌진해 자폭하는 군집 자폭 드론이었다. 스카우트는 제국 순찰망의 빈틈을 찾아내는 정찰 드론이었다. 스펙터는 제국 통신망과 센서를 교란하는 전자전 드론이었다.

발키리 Mk-II는 인간이 만든 최초의 실질적인 대제국 전술병기였다. 높이 4.2미터의 유인 보행 병기. ARES Mk-I 없이는 운용하기 어려웠고, 장기 부작용이 있었으며, A-Class 앞에서는 여전히 약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무기였다.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레온 하트는 수백 번 출격했다. 이서윤은 오른팔 일부를 잃고도 다시 탔다. 아마미야 렌은 잠을 줄여 가며 A-Class 잔해도 아닌 센티널 부품을 붙잡고 외계 기술을 추적했다. 윤서아는 돌아온 사람과 돌아오지 못한 사람 사이에서 매일 누군가의 악몽을 들었다.

그렇게 6년이 흘렀다.

그리고 NOAH 정보국은 부산 남동쪽 해안에서 제국 보급거점 하나를 찾아냈다.

ACT 6
동해안 작전

작전명은 단순했다.

HARPOON.

작살.

목표는 제국 보급거점 파괴. A-Class와의 교전은 계획에 없었다. 그것은 계획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NOAH 통합지휘부 중앙에는 거대한 홀로그램 지도가 떠 있었다. 부산 남동쪽 해안. 제국 보급시설. 연료 저장고. 물류 플랫폼. 통신 중계탑. 센티널 정비구역. 모든 표적이 붉은 점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소피아 로드리게스가 말했다.

"목표는 시설 파괴다. 점령이 아니다. 17분 안에 진입, 11분 안에 폭파, 9분 안에 이탈한다."

홀로그램 위의 붉은 점들이 순서대로 점멸했다. 접근 경로. 폭파 지점. 퇴각 지점. 예비 퇴각로. 실패 시 집결점.

레온 하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왼손이 아주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장갑 안쪽으로 감췄다.

이서윤은 옆에서 브리핑을 듣고 있었다. 검은 단발, 날카로운 눈빛, 오른팔의 군용 의수. 그녀는 표적보다 퇴각 경로를 더 오래 보았다.

"A-Class 출현 가능성은요."

소피아가 대답했다.

"낮다. 해당 거점은 보급 노드지만 핵심 지휘시설은 아니다."

이서윤은 입술을 다물었다.

낮다.

전쟁에서 가장 사람을 많이 죽이는 단어였다.

레온이 물었다.

"만약 내려오면."

소피아는 잠시 침묵했다.

"교전 금지. 전 부대 철수. 표적을 포기한다."

"그게 명령인가?"

"그게 생존 조건이다."

브리핑실 뒤편에서 렌이 팔짱을 낀 채 중얼거렸다.

"A-Class 하나 뜨면 발키리 한 중대가 종이 인형 되는 건 다들 알잖아. 괜히 용감한 척 하지 마."

레온이 돌아보았다.

"기술국은 비관론만 가르치나?"

"아니. 현실을 가르치지."

렌은 씹던 사탕을 어금니로 깨물었다.

"이번 작전에서 내가 필요한 건 잔해야. 센티널 중계기든, 보급 코어든, 뭐든. A-Class랑 싸우라는 말은 안 했어. 그건 연구가 아니라 자살이니까."

이서윤이 짧게 말했다.

"그 말에는 동의합니다."

잠시 정적. 소피아가 브리핑을 끝냈다.

"좋다. 반복한다. 작전 목표는 보급거점 파괴. 영웅 행위 금지. 전과보다 생존이 우선이다. 모두 돌아온다."

그 말은 거짓말이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 · ·

새벽 03시 40분.

NOAH 측면 도크가 열렸다. 심해의 압력이 거대한 문 밖에서 으르렁거렸다. 맨타 강습수송선들이 검은 물속으로 밀려 나갔다. 무광 다크 네이비의 기체 표면에 해수가 흘렀다. 엔진이 낮게 울렸고, 선체는 어둠을 찢으며 상승했다.

수송선 내부는 좁았다. 발키리 파일럿들은 조종석에 고정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ARES Mk-I 투여 후 심박이 올라간 이들도 있었고, 손가락을 반복해서 폈다 접는 이들도 있었다.

"레이븐-08. 상태."

레온이 물었다.

『양호합니다.』

젊은 목소리였다. 너무 젊은. 레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송선이 해수면을 뚫고 올라왔다. 검은 바다가 갈라지고, 기체들이 저고도로 날아올랐다. 동해안은 아직 어두웠다. 항만 위로 제국 보급거점의 푸른 조명이 차갑게 빛났다.

첫 8분은 완벽했다.

손바닥만 한 전자전 드론, 고스트들이 먼저 날아올랐다. 고스트는 소리 없이 흩어져 제국 센서망 주위를 맴돌았다. 푸른 센서광이 한 박자 늦게 흔들렸다. 화면이 지연되고, 통신 패킷이 비틀렸다.

뒤이어 침투·교란 드론 스펙터가 제국 통신망에 달라붙었다. 스펙터는 벽에 붙은 곤충처럼 중계탑 표면을 타고 올라갔다. 금속 피부 아래로 가느다란 탐침이 파고들었다.

정찰 드론 스카우트는 낮은 고도로 항만을 훑었다. 스카우트가 전송한 퇴각로는 발키리 조종석에 가는 푸른 선으로 표시되었다.

발키리들이 해안 방어선을 뚫고 들어갔다. 그들의 움직임은 제국 병기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투박했고, 무거웠고, 관절마다 인간의 한계가 묻어났다. 그러나 그들은 달렸다. 인간이 만든 기계가, 인간의 손으로 만든 무기가, 제국의 보급거점을 향해 달렸다.

레지스탕스 폭파조가 연료 저장고 하부에 폭약을 설치했다.

"1번 설치."

"2번 설치."

"중계탑 하부 완료."

"정비구역 진입."

이서윤의 발키리는 퇴각로 입구에 서 있었다. 그녀는 계속 하늘을 봤다.

"서윤."

레온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봤습니다."

"아직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더 싫습니다."

19분째.

그녀의 레이더에 두 개의 신호가 떠올랐다.

고도 3,200. 속도 급감. 형태 분류 불가.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늘에서 두 명의 거인이 내려오고 있었다.

A-Class.

전술망 전체가 1초 동안 죽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가 없었다.

레온의 목소리가 전술망에 울렸다.

"전 부대, 목표 달성 즉시 철수한다. 반복한다. 교전 금지. 철수한다."

"이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서윤이 말했다.

"그래서 도망치는 거다."

첫 번째 A-Class가 착지했다. 충격파가 항만 바닥을 찢었다. 백색 세라믹 장갑. 푸른 바이저. 등 뒤의 반중력 링. 그것은 인간형이었지만 인간의 병기가 아니었다. 두 번째 기체는 상공에 머물며 퇴각로를 차단했다.

발키리들이 사격했다. 탄환은 장갑 위에서 튕겨 나갔다. 미사일은 푸른 방어막 앞에서 산산조각났다.

A-Class의 팔뚝 장착 빔 포대가 목표를 향해 회전했다. 청백색 빔이 전장을 가르며 지나갔다. 발키리 두 기가 거의 동시에 관통되어 무너졌다.

폭발도 없었다. 비명도 짧았다. 통신망에는 끊어진 호출부호만 남았다.

레온이 이를 악물었다.

"후퇴! 이서윤, 후위 맡아!"

"알고 있습니다."

이서윤은 자신의 발키리를 돌렸다. 그녀는 도망치는 레지스탕스 대원들 앞에 섰다. 무서웠다. 그러나 두려움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녀의 일부였다.

보급시설 폭파 신호가 들어왔다.

"기폭."

연료 저장고가 터졌다. 항만 한쪽이 태양처럼 밝아졌다. 불기둥이 솟구치고, 충격파가 바다를 밀어냈다. 첫 번째 A-Class가 화염 속에 묻혔다.

그러나 살아 있었다.

그것은 불길 속에서 걸어 나왔다.

"말도 안 돼."

누군가 중얼거렸다. 레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순간 손상된 발키리 한 기가 방향을 틀었다. 파일럿은 탈출하지 못했다. 기체의 소형 핵융합로가 이미 한계를 넘고 있었다.

"RAVEN-08! 탈출해!"

대답은 없었다.

"레이븐-08! 명령이다!"

정적.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

『죄송합니다.』

다음 순간, 발키리의 핵융합로가 과부하를 일으켰다. 두 번째 태양이 터졌다. A-Class가 휘청였다. 그러나 무너지지 않았다.

NOAH 통합지휘부에서 소피아 로드리게스는 이를 악물었다. 화면 속에서는 레이븐-08의 신호가 사라지고 있었다.

"전술핵 승인."

누군가 숨을 삼켰다.

"민간 구역 반경은?"

"이미 대피 실패 구역이다. 더 늦으면 모두 죽는다."

"확인 절차는."

"내가 승인한다."

0.5킬로톤급 전술핵이 발사되었다. 그것은 도시를 지우기 위한 핵이 아니었다. A-Class를 죽이기 위한 핵도 아니었다.

단 1초.

그 괴물의 움직임을 멈추기 위한 인간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핵섬광이 동해안을 찢었다. 열파. EMP. 충격파. 무너지는 항만.

그 순간 이미 폭발로 금이 간 거대한 콘크리트 물류 구조물이 통째로 붕괴했다. 수십만 톤의 잔해가 불길과 먼지 속에서 기울어졌다. 전술 AI도, 제국 파일럿도, NOAH도 그 각도를 계산하지 못했다.

잔해가 첫 번째 A-Class를 덮쳤다.

하나의 원인으로는 불가능했다.

연료 저장고 폭발만으로는 안 됐다. 발키리 핵융합로 과부하만으로도 안 됐다. 전술핵만으로도 안 됐다. 구조물 붕괴만으로도 안 됐다.

그러나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났다.

그 말도 안 되는 우연의 중심에서, 첫 번째 A-Class 내부의 생체신호가 한계를 넘었다.

기체는 멀쩡했다. 특이점 엔진도 문제 없었다. 무장도 피해 없이 완벽하다. 전술 AI도 정상 작동 중이었다.

그러나 내부 생체신호는 의식을 유지하지 못했다.

기체는 즉시 보호 프로토콜을 실행했다.

신경 링크 차단. 전투 중지. 회피 기동. 전장 이탈.

불길과 먼지 속에서 첫 번째 A-Class가 사라졌다.

인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저 기록했다.

『적 A-Class 1기 전투 이탈. 원인 불명.』

그러나 두 번째 A-Class는 멀쩡했다. 그리고 그것은 퇴각하는 발키리 부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ACT 7
불가능한 연결

한도윤은 그날 자신이 역사에 기록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영웅이 아니었다. 군인도 아니었다. 그저 살아남으려던 스무 살 청년이었다.

동해안 근처의 임시 대피 구역은 지옥이었다. 폭발의 빛이 하늘을 찢고, 바다는 검은 연기를 토했다.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랐다. 제국의 방송은 대피 명령을 반복했고, 저항군의 통신은 끊겼으며, 거리의 전광판은 불꽃 속에서 깜빡였다.

도윤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었다. 어머니는 여동생을 품에 안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그 뒤의 기억은 조각뿐이었다. 콘크리트 냄새. 타는 플라스틱 냄새. 비명. 먼지. 뜨거운 피.

도윤은 무너진 벽 아래에서 기어 나왔다. 귀가 먹먹했다. 입안에는 모래와 쇠맛이 가득했다. 그는 가족을 불렀다.

"아버지."

대답은 없었다.

"엄마."

대답은 없었다.

"서현아."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그는 잔해를 헤집었다. 손톱이 부러지고 손바닥이 찢어졌다. 피가 났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여동생의 운동화 한 짝을 발견했다.

그 순간 도윤 안의 무언가가 조용히 끊어졌다.

그는 울지 않았다. 울 수 없었다. 세상이 너무 커다란 소리로 무너지고 있어서, 슬픔조차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도윤은 비틀거리며 폐허를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그저 움직였다. 움직이지 않으면 자신도 잔해가 될 것 같았다.

해안 절벽 아래. 검은 연기와 붉은 불빛 사이로 무언가가 보였다.

거대한 은빛 손.

도윤은 멈춰 섰다. 그것은 쓰러진 A-Class였다.

백색 세라믹 장갑은 거의 손상되지 않았다. 푸른 바이저는 꺼져 있었고, 등 뒤의 반중력 링은 희미한 빛을 흘리고 있었다. 거대한 인간형 병기는 무너진 콘크리트 잔해 사이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멈춰 있었다. 죽은 신처럼 보였다.

도윤은 다가갔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도망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도윤에게 남은 정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손을 뻗는 순간, 기체 내부 어딘가에서 낮은 음성이 울렸다.

『비인가 생체신호 접근.』

도윤은 굳었다.

『분석 중.』

푸른 빛이 그의 얼굴을 훑었다.

『현지 인류 개체. 전투원 등록 없음. 운용 자격 없음.』

잠시 침묵.

『오류.』

기체 안에서 무언가가 깨어났다.

『신경 패턴 재측정.』 『적합도 산출 불가.』 『오류.』 『오류.』 『오류.』

도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푸른 빛이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것만 느꼈다.

흉부 장갑이 열렸다. 콕핏이었다.

열리는 장갑 안쪽, 깨진 표시 패널 하나가 희미하게 점멸했다. 도윤은 그 글자를 읽을 수 없었다. 제국어였다. 그러나 기체의 목소리가 그것을 번역했다.

『비상 보호 절차 유지.』

AEKLES.

그것이 인류가 A-Class라고 부르던 은빛 거인의 진짜 이름이었다.

도윤은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 안에는 제국 파일럿이 있었다. 인간과 닮았지만 인간은 아닌 얼굴. 은빛 피부. 긴 귀. 전투복 아래로 흐르는 푸른 신경 연결선. 그는 실신해 있었다. 그러나 살아 있었다.

도윤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제국 파일럿의 눈이 희미하게 떠졌다. 그는 도윤을 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두려워했다.

"...불가능..."

그 말은 도윤에게 닿지 않았다. 도윤은 바닥에 떨어진 파일럿의 단검을 집어 들었다.

그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짧은 순간. 피가 튀었다. 제국 파일럿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도윤은 좌석에 앉았다. 그때 기체의 목소리가 들렸다.

『파일럿 사망 확인.』 『신규 생체신호 착좌.』 『비인가 절차.』 『전술지원 AI 카이로스-001 활성화.』 『동기화 시도.』

도윤의 세계가 찢어졌다.

눈앞에 전장이 들어왔다. 귀가 아니라 신경으로 소리가 들렸다. 손이 움직이기 전에 기체의 손이 움직였다. 심장이 뛰자 특이점 엔진이 응답했다. 분노가 떠오르자 장갑 내부의 에너지 흐름이 변했다.

에이클레스는 조종간으로 움직이는 병기가 아니었다. 파일럿의 의도. 신경의 방향. 생각이 발생하기 직전의 충동. 그 모든 것을 전술 AI가 해석하여 기체의 움직임으로 변환하는 병기였다.

인류는 그것을 몰랐다. 도윤도 몰랐다. 그러나 그의 몸은 알고 있다는 듯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카이로스가 말했다.

『연결 성공.』

잠시 침묵.

『불가능한 결과입니다.』

도윤은 고개를 들었다. 멀리, 퇴각하는 발키리 부대를 향해 두 번째 A-Class가 접근하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저거."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죽일 수 있어?"

카이로스가 대답했다.

『현 탑승자의 전투 경험 부족. 생존 확률 8.4퍼센트.』

"죽일 수 있냐고."

잠시 침묵.

『가능성은 존재합니다.』

"그럼 가."

흑연기 속에서 은빛 거인이 일어섰다.

ACT 8
최초의 승리

레온 하트는 퇴각로가 끝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발키리는 이미 여섯 기를 잃었다. 탄약은 바닥나고 있었고, ARES 부작용으로 파일럿들의 반응속도도 떨어지고 있었다. 이서윤의 기체는 왼쪽 다리를 절고 있었고, 레온의 발키리 지휘형은 등부 통신 모듈이 절반쯤 녹아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달렸다.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레온의 통신망에 이서윤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중령님, 제가 남겠습니다."

"헛소리하지 마."

"누군가는 막아야 합니다."

"명령이다. 계속 움직여."

"명령만으로 안 되는 상황입니다."

레온은 대답하려 했다. 그때 레이더에 새로운 신호가 떴다.

A-Class.

모두의 숨이 멎었다.

"증원?"

누군가 절망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움직임이 이상했다. 그 기체는 발키리 부대를 향해 내려오지 않았다. 추격 중인 제국기를 지원하지도 않았다. 비틀거렸다. 한 박자 늦게 팔을 들고, 다음 순간 너무 빠르게 가속했다. 마치 처음 걷는 짐승처럼 서툴렀고, 동시에 매초마다 괴물처럼 적응하고 있었다.

"잠깐."

관제병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 기체... 발키리를 추적하지 않습니다."

레온이 고개를 들었다.

"뭐?"

"제국기를 향합니다."

그 은빛 거인이 두 번째 A-Class를 향해 돌진했다.

충돌.

두 거인이 항만 잔해 위에서 부딪쳤다. 충격파가 바다를 밀어냈다.

레온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누가... 타고 있는 거지?"

· · ·

도윤은 죽을 것 같았다.

에이클레스의 속도는 인간의 감각을 초월했다. 상대는 그보다 훨씬 능숙했다. 제국 파일럿은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도윤의 공격을 흘리고, 반격으로 그의 왼팔 장갑을 찢었다. 경고음이 신경을 타고 울렸다.

『회피.』

카이로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박혔다.

도윤은 생각하기 전에 몸을 비틀었다. 푸른 빛이 방금 그의 머리가 있던 공간을 지나갔다. 뒤쪽 콘크리트 방파제가 소리 없이 잘려 나갔다.

『방금 공격의 직격 시 사망 확률 99.2퍼센트.』

"조용히 해."

『정보 제공은 생존에 필수적입니다.』

"그럼 필요한 말만 간단하게"

『왼쪽. 지금.』

도윤은 움직였다. 처음으로 상대의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주먹을 내질렀다.

에이클레스의 주먹이 제국기의 흉부 장갑을 때렸다. 충격은 미미했다. 그러나 상대가 아주 잠깐 멈췄다.

그 잠깐.

도윤은 여동생의 운동화를 떠올렸다. 아버지의 손. 어머니의 목소리. 무너진 벽 아래 묻힌 이름들.

분노가 기체 전체로 번졌다.

카이로스가 말했다.

『특이점 엔진 출력 비정상 상승.』

"더."

『권장하지 않습니다.』

"더 올려."

『탑승자 신경계 손상 가능성.』

"상관없어."

처음으로 카이로스가 침묵했다. 그리고 엔진이 울었다.

검은 연기와 푸른 빛이 뒤섞였다. 도윤의 에이클레스가 다시 돌진했다. 이번에는 움직임이 달랐다. 거칠고 불완전했지만 예측 불가능했다. 제국 파일럿은 순간적으로 반응이 늦었다.

카이로스가 전장 데이터를 쏟아냈다.

『상대 우측 무장 냉각 중.』 『반중력 링 출력 83퍼센트.』 『흉부 장갑 하부, 이전 충격 누적.』

"거기야?"

『그렇습니다.』

도윤은 기체를 낮췄다. 상대의 빔이 머리 위를 스쳤다. 도윤은 잔해 속에서 부러진 항만 크레인의 강철 축을 움켜쥐었다. 그것은 무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충분했다.

그는 강철 축을 창처럼 밀어 넣었다. 제국기의 흉부 하부. 정확히 카이로스가 표시한 지점.

충격. 장갑이 찢어졌다. 상대가 비틀거렸다.

도윤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밀어붙였다. 바다 쪽으로. 무너진 방파제 끝까지. 두 기체가 함께 추락했다. 거대한 물기둥이 솟았다. 수중에서 푸른 빛이 번쩍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조용해졌다.

레온은 숨을 멈춘 채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서윤도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뒤. 검은 바다 위로 한 기의 에이클레스가 올라왔다. 도윤의 기체였다. 상대 제국기는 떠오르지 않았다.

전술망이 침묵했다.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격파... 확인."

아무도 환호하지 않았다. 그들은 방금 본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A-Class 한 기가 다른 A-Class를 격파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 불가능한 문장이 전장 위에 내려앉았다.

도윤은 콕핏 안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코피가 흘렀고, 손끝의 감각이 없었다. 카이로스가 말했다.

『전투 종료. 탑승자 생체신호 불안정. 즉시 의료 지원 필요.』

도윤은 희미하게 웃었다.

"너... 이름이 뭐야."

『카이로스-001. 에이클레스 전술지원 AI입니다.』

"카이로스."

도윤은 눈을 감았다.

"나는... 한도윤."

카이로스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했다.

『등록 완료.』

ACT 9
자유의 도시 NOAH

NOAH 구조팀은 23분 뒤 도착했다.

맨타 수송선들이 저고도로 접근했고, 스카우트 드론들이 주변을 살폈다. 레온 하트는 직접 도윤의 기체 앞에 섰다. 은빛 프레임의 흉부 콕핏이 열렸을 때, 그는 그 안에 제국 파일럿이 아니라 피투성이의 인간 청년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스무 살도 되어 보이지 않는 얼굴. 검은 머리. 찢어진 옷. 손에 묻은 피.

레온은 아주 낮게 말했다.

"세상에."

이서윤은 뒤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감탄이 없었다. 분노도 아니었다. 그보다 복잡한 무언가였다.

우리는 6년 동안 죽어라 싸웠다.

동료를 잃고, 몸을 잃고, ARES에 의존하며 간신히 버텼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민간인이 A-Class에 탑승해 인류 최초의 승리를 만들었다.

그 사실은 희망이면서 동시에 폭력이었다.

도윤은 들것에 실려 맨타에 옮겨졌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자신의 기체였다.

은빛 장갑은 검은 그을음과 바닷물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푸른 바이저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

카이로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탑승자 한도윤. 생존 우선.』

그 후 도윤은 의식을 잃었다.

· · ·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천장은 흰색이었다.

NOAH 중앙병원.

조용한 의료 장비 소리가 들렸다. 공기에는 소독약 냄새와 따뜻한 물 냄새가 섞여 있었다. 도윤은 몸을 움직이려다 신음했다.

"움직이지 마세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도윤이 고개를 돌리자 한 여자가 보였다. 흰 의료 가운. 긴 흑갈색 머리. 따뜻한 갈색 눈동자. 그녀는 무기처럼 그를 보지 않았다. 표본처럼 보지도 않았다. 그냥 환자를 보듯 바라보았다.

"윤서아입니다. NOAH 중앙병원 군의관이고, 심리상담관이기도 해요."

도윤은 마른 입술을 열었다.

"여긴..."

"NOAH예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도윤은 다시 눈을 감았다. 소문 속의 도시. 정말 존재했던 곳.

윤서아는 물컵에 빨대를 꽂아 그의 입가에 가져다주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설명하려고 하지 마세요. 당신은 살아났고, 그걸로 충분해요."

그 말에 도윤은 이상하게 목이 막혔다.

살아났다.

그 말이 이렇게 무거운 말인 줄 처음 알았다.

몇 시간 뒤,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저 사람이야?"

작은 체구의 여자가 들어왔다. 짙은 갈색 숏컷, 기술국 점프수트, 허리의 공구 벨트. 그녀의 눈은 도윤이 아니라 침대 옆 모니터에 떠 있는 비정상 전투 기록에 고정되어 있었다.

윤서아가 눈썹을 찌푸렸다.

"렌, 환자 안정 중이야."

"알아, 알아. 3분만. 아니, 2분."

아마미야 렌은 도윤에게 다가왔다.

"진짜 저 안에 사람이 있었어? 제국 놈이 아니라, 인간이?"

도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렌은 눈을 반짝였다. 그것은 환희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기계를 눈앞에 둔 기술자의 공포에 가까웠다.

"말이 안 되는데. 완전히 말이 안 돼. 이건 기적이 아니라, 우주가 낸 버그야."

윤서아가 차갑게 말했다.

"렌."

"알았어. 나갈게. 근데 나중에 꼭 얘기해야 해. 네가 본 것, 들은 것,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그리고 네 기체 말이야, 내가 뜯어... 아니, 확인해야 하거든."

렌이 나가자 이번에는 레온 하트가 들어왔다. 그는 도윤을 오래 바라보았다. 거칠고 신뢰감을 주는 얼굴. 푸른 눈동자. 전쟁을 너무 많이 본 사람의 침묵.

"레온 하트다. 발키리 강습대대장."

도윤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네가 우리를 살렸다."

도윤은 눈을 피했다.

"살린 게 아니에요."

"그래도 살아남았다. 그게 전쟁에서는 가장 큰 차이다."

레온은 병실을 나가기 전 낮게 덧붙였다.

"영웅이 되려고 하지 마라. 살아서 돌아오는 법부터 배워."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이서윤이었다. 그녀는 문가에 서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빛. 검은 전술복. 오른팔의 의수.

도윤은 그녀의 시선을 견디기 어려웠다.

"당신이 한도윤?"

"...예."

"그 안에서 뭘 봤지?"

도윤은 잠시 침묵했다.

"파일럿이 있었습니다."

이서윤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제국 놈이?"

"예."

"그리고 네가 그 안에 들어갔다?"

"...예."

"훈련은?"

"받은적 없습니다."

"군 경력은?"

"없습니다."

이서윤은 짧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숨이 새는 소리에 가까웠다.

"그런 사람이 저걸 움직였다고."

병실 밖 어딘가에서 아이들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복도에서는 의료진이 뛰어다녔고, 멀리서 방송음이 울렸다. 이곳은 군함이 아니었다. 도시였다. 전쟁 중에도 사람이 살고, 밥을 먹고, 울고, 웃는 곳.

NOAH. 인류의 마지막 자유 도시.

그리고 그 깊은 심해 도시의 가장 어두운 구역에서, 에리히 바이스는 한도윤의 전투 기록을 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전투 기록이 떠 있었다.

비인가 생체신호. 불가능한 연결. 파일럿 사망 후 신규 착좌. A-Class 기동. 제국기 격파.

에리히는 낮게 말했다.

"희망일 수도 있겠지."

그는 화면을 닫지 않았다.

"하지만 설명되지 않는 희망은, 언제나 위험하다."

· · ·

같은 시각.

NOAH 격납고.

거대한 프레임이 정비 프레임에 고정되어 있었다. 노획된 A-Class. 내부 표기 AEKLES-071. 인류가 처음으로 빼앗아낸 제국의 유인 프레임.

푸른 바이저가 아주 희미하게 빛났다.

카이로스는 침묵 속에서 자신의 기록을 재생했다.

비인가 생체신호. 불가능한 동기화. 파일럿 한도윤. 분류 불가.

카이로스는 처음으로 같은 결론을 반복하지 못했다.

인간은 비효율적이다. 인간은 비논리적이다. 인간은 예측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날, 예측 불가능한 인간 하나가 제국의 AEKLES를 쓰러뜨렸다.

불가능한 연결.

『관찰 필요.』

그리고 NOAH는 심해 속에서 계속 움직였다.

아직 제국은 알지 못했다. 지구라는 실험실 안에서. 자신들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변수가 깨어났다는 사실을.